“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 말은 세계 민권운동의 기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다.
내 비록 나태한 서생에 불과하지만, 나에게도 꿈이 있다

그 꿈은 죽기 전에 당나귀 한 마리를 키워보고 싶다는 것이다.내가 키울 당나귀는 기왕이면 내 젊은 날부터 비행기삯만 마련되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훌쩍 날아가 헤매던 히말라야 그 비좁은 산길에서 만나곤 하던, 그런 당나귀여야 한다. 히말라야 당나귀는 순하고 힘 좋고, 조심성이 깊은데다 눈이 좋아 벼랑에 굴러 떨어지지도 않고, 사람을 물지도 않을 뿐더러 공연히 뒷발질로 사람을 차지도 않는다. 수년 전 한 방송사에서 공들여 만들어 깊은 감동을 준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 나오던 그 당나귀가 바로, 내가 키우고 싶은 당나귀다.
 
그런데 그 당나귀를 어떻게 이곳까지 건강하게 잘 데리고 온단 말인가? 실로 난제다. 그러나 그 난제도 사실 곰곰 생각해보면 풀지 못할 난제는 아니다. 강대국과 살상용 무기가 필요한 분쟁지 나라들 사이에서 거래하는 품목들을 가만히 보니 장갑차도 사고팔고, 전투기도 사고팔고, 미사일도 사고파는 게 분명했다. 그런 게 사실인진대 까짓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히말라야 당나귀 한 마리 정도를 못 들여올까?
 
당나귀를 구해오면, 당나귀를 일단 닭장에 넣어놓고, 이웃집 앵두할아버지한테 달려가 연구소 앞마당의 거위집 앞으로 펼쳐진 논을 내게 파시라고 부탁할 참이다. 할아버지 연세가 이미 94세. 이미 그 논은 이태 전부터 다른 이에게 농사지으라고 빌려준 터이지 않겠는가. 논을 빌린 이는 논농사를 지을 줄 알았더니만 쌀농사는 지어봤자 수지가 안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선 콩밭을 만들어버렸다. 그 농부는 콩밭 가장자리에 고라니 침입을 막기 위해 검은 비닐그물을 치고, 콩밭에 엄청난 정성을 기울였지만 수확은 별로였던 것 같다.
 
나는 앵두할아버지에게 내 필생의 소원이 내 힘으로 논농사를 지어 단 한 끼라도 내가 소출해낸 쌀로 밥을 해먹는 것이라고 간곡한 얼굴로 말씀드리며, 논을 파시라고 부탁드릴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 어른께서 논을 팔면, 논을 사기 위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재산들, 이를테면 오래 끌고 있는 자동차나 컴퓨터, 프린터, 세계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 심지어 등산화와 휴대폰, 쓰지 않는 만년필까지 돈이 될 성싶은 것들을 모조리 팔아서, 그렇지만 그 돈이 필경 몇 푼 안 될 것이므로 죽을힘을 다해 모자라는 돈을 보태 논을 장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콩밭을 전폐하고 다시 논으로 복원해 논농사를 지으면서 논 가장자리에 길고 홀쭉한 당나귀 길을 만들 것이다. 그 길은 히말라야의 비탈길처럼 좁지만 빗물이 우선 잘 빠져야 하고, 밟을 때마다 사람과 당나귀를 밀어올리는 부드러운 탄력이 있어야 한다. 정성껏 밟고 공을 들이다보면 단단하되 흡수력이 강한 멋진 흙길이 될 것이다.

논가의 당나귀길로 나는 아침마다 당나귀를 끌고 산책을 할 것이다. 어떤 날은 당나귀의 컨디션을 살핀 뒤 당나귀 잔등에 재빠르게 올라타기도 할 것이다. 당나귀 목에는 뎅그렁 뎅그렁, 맑고 깊은 소리를 내는 쇠부랄만한 쇠종을 하나 매달아 놓을 것이다.그러면 당나귀와 내가 흔들릴 때마다 고요한 시골 아침의 맑은 대기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딩딩, 뎅그렁 뎅그렁, 멀리까지 울려퍼질 것이다.
 
마을에 하루 세 번씩 들어오는 시내버스가 지나간 뒤에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핀 뒤, 큰길까지 당나귀를 끌고 나갈 것이다. 그래서 마을 뒷산의 저수지에도 올라가고, 때로는 고라니와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부엉이다리를 지나 시내로 이어지는 입구까지 내 산책길을 확장할 것이다. 가을이면 당나귀와 나는 떨어진 낙엽을 밟게 될 것이므로 발밑에서는 사각사각, 매우 듣기 좋은 소리가 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시내에는 당나귀를 안 끌고 나갈 것이다. 아무리 시골의 중소도시라지만 시내는 너무 많은 차량과 차량이 내뿜는 매연 때문에 당나귀가 틀림없이 고통스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지금 놀고 있는 툇골 골짜기에서만 당나귀와 놀 것이다. 늙어서 위험스럽게 오토바이나 경운기를 타고 노는 것보다 히말리야 당나귀와 노는 것이 훨씬 남 보기에도 본보기가 될 것이고, 친구들이 놀러와 봐도 ‘뽄때’ 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싶다.
 
당나귀를 끌고, 혹은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나는 죽기 전에 내가 못다 한,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부질있는 일들과 부질없는 일들이 당나귀 등에 올라타면 선명하게 구별될 것이다. 신세진 사람들에게 충분한 답례를 했는가, 살펴볼 것이다. 그뿐인가. 젊은 날 나를 버리고 간 옛 애인의 안녕에 대해서도 가끔 생각할 것이고, 피치 못하게 내가 떠나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들에 대해서도 더러 생각할 것이다. 한 시민으로서 평생 동안 충분히 내 나라가 살기 좋고 인간적인 사회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하고 깜냥껏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을 해왔지만, 여전히 인류가 핵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다는 문제와 기후변화나 오일피크에 사람들이 너무나 무관심한 데 대해, 혹은 무지막지한 토목공사로 이 아름다운 내 나라 산천이 대책 없이 파괴되고 있는 데 대해서도 깊은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뿐인가. 체르노빌에 이어 후쿠시마에서도 끔찍한 사고가 났건만, 그 무서운 사건에서 아무것도 배우려 들지 않는 내 나라의 무신경에 대해서 내 당나귀와 같이 무거운 얼굴로 탄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일들을 내 힘만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한계 때문에 나는 이내 쓸쓸한 심정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내가 쓸쓸해지면 내 당나귀도 쓸쓸해질 것이다.
 
내 품을 벗어난 두 딸자식들이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물신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혹시 흔들리지나 않고 있는지 당나귀 위에서 안부전화를 걸어볼 것이고, 내 대단찮은 생애에 걸쳐 내가 맡아야 했던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혹시 생각이 짧거나 넘쳤던 적은 없었는지 당나귀 잔등에서 흔들리면서 반성할지도 모른다. 우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것이다. 언제 어느 때나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아도 되는 좋은 친구를 한명쯤 가지기를 평생 그토록 갈망했지만, 내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헌신했던 적이 있었던가, 냉철하게 자문해볼 것이다.
 
사랑하는 내 당나귀는 내가 뭔가 자숙하는 심정일 때에는 틀림없이 내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을 것이고, 내가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면 덩달아 겅충겅충 달리기도 할 것이다. 진종일 당나귀 등에서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당나귀 잔등에서 내려선 뭘 하나? 나는 하루 종일 당나귀를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사용할 것이다. 내 논에서 생산된 쌀겨를 마굿간에 넉넉하게 깔아줄 것이고, 현미를 깎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온 ‘싸래기‘는 여물을 끓일 때마다 듬뿍 넣어 줄 작정이다. 당나귀가 좋아하는 풀을 나는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는 땅위의 여러 풀들에 대해 전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말만 앞세우고 나약하게 만들기 쉬운 책보다는 언제나 과묵하고 믿음직스러운 당나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삼태기를 둘러매고 들과 산에서 좋은 먹을거리를 구하고, 닭장을 개조한 마굿간은 언제나 신속하게 똥을 치워 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당나귀 똥은 히말라야 사람들처럼 양지 바른 곳의 편편한 돌 위에 잘 펼쳐 말려 여물을 끓일 때 땔감으로 사용할 작정이다. 틀림없이 구수한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나는 일처럼 자주 당나귀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줄 것이고 그의 뺨에 내 뺨을 자주 비벼댈 것이다. 때없이 내가 당나귀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면, 검고 맑은 눈을 가진 당나귀는 어김없이 성의껏 반응할 것이고, 그 일련의 시간들은 어쨌거나 나를 무척이나 황홀하게 할 것이다.

대장간에서는 좋은 쇠붙이로 편자를 넉넉하게 주문해 맞춰놓을 것이다.
간혹 친구들이 찾아와 내 당나귀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 그 친구가 평소 신중한 사람이었다면 기꺼이 고삐를 건네줄 용의가 있다. 그리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내 논자락의 당나귀길에서 산책을 해보라고 권할 것이지만, 절대 함부로 올라타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어떤 예리하고 당돌한 젊은 친구가 “왜 하필이면 당나귀지요?”라고 물으면, 나는 “그렇담, 염소를 타야 옳단 말이오?!”라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 그는 내 짧고 무뚝뚝한 답변에 자신이 왠지 묵살당한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죽기 전에 어떤 사람이 필생의 결단으로 당나귀를 키우든, 배추벌레를 키우던 그것은 궁금해하기보다는 무조건 존중해줘야 하는 게 옳은 태도라는 게 그것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 말은 세계 민권운동의 기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다.
내 비록 나태한 서생에 불과하지만, 나에게도 꿈이 있다
그 꿈은 죽기 전에 당나귀 한 마리를 키워보고 싶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