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리더십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활발하다. 그만큼 이 시대가 리더에 대한 갈망이 크다는 방증이다. 유행하는 리더십 이론들을 보면 대체로 기존의 윤리 덕목이나 규범적 가치들을 재해석 내지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서양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이러한 덕목 중심의 리더십 이론은 새로움이 덜해 감화력이 다소 떨어진다. 우리의 정서적 토양에 맞지 않아 학습 따로 행동 따로일 때가 많다.

주위에 아첨꾼을 가려내야

새해 첫날 경기도 여주의 세종 영릉을 찾았다. ‘한국형 리더십’을 가장 성공적으로 발휘한 세종대왕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국형 리더십’이란 한마디로 시간을 초월해 한국인들을 신명나게 하는 리더십 코드를 뜻하는데, 세종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한국형 리더이다. 한국형 리더십을 발굴하여 앞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갈 청년세대들에게 소개하고 교육하는 것을 나는 사명으로 삼고 있다. 미래 교육의 실질적 목표는 다름 아닌 리더의 육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자아성장을 위해서든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든 리더십 역량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영릉 입구 훈민문을 들어서는데, 어젯밤 내린 서리로 소나무들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문득 세종 재위 시절 ‘감로(甘露) 논란’이 떠올랐다. 서리 내린 소나무 가지에 꿀 같은 이슬방울을 발견한 신하가 “임금의 지극한 정성과 효도에 감동하여 하늘이 내린 감응”이라면서, 축하잔치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록을 보면, 유독 세종시대에 상서로운 일들이 많았다. 경기도 관찰사는 한 줄기에 이삭이 네 개나 달린 보리를 들고 와 “이처럼 신령스런 일이 발생한 것은 육부와 삼사가 잘 다스려진 까닭”이라며, 이것을 기리는 행사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아름다움을 과장하는 것을 나는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라면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아첨성 발언을 차단했다.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때도 세종은 자신의 재위 중 업적을 포함시키자는 신하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당대의 일을 가지고 찬송하게 할 수 없다[未可以當世之事 而詠歌之也]”며, 지금 일은 “뒷세상에서 평가하여 그 때 노래하게 하자.”고 하였다.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세종 능침이 바라다 보이는 소나무 숲 벤치에 앉아 <국역 세종실록> 7권을 펴들었다. 재위 11년인 1429년의 기록인데, 그 해에도 봄처럼 따뜻한 겨울 날씨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진 소식, 왕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기사 등도 눈에 띄었다. 가장 관심을 끈 사건은 그해 9월의 군자감(軍資監: 군량미와 군수품 담당 관청) 건물 붕괴사건이었다.

수리 중이던 건물이 갑자기 무너져서 5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세종은 “압사당한 사람들이 매우 가엾다”면서 모든 정치 일정을 멈추게 하였다. 의금부 보고에 따르면 담당 관리들이 다 달아나서 즉시 구료(救療)했으면 살 수 있는 사람들까지도 죽게 만들었다. 세종은 즉시 의사를 보내 치료케 하는가 하면, 사고를 당한 승려들의 고향집에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보호하게 했다. 그런 다음 담당 관리를 엄중 처벌했다.

“기울어져 험한 집을 바로 잡으려면 먼저 기계를 준비했어야 하고,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담당자들이 그러지 않았을 뿐더러 즉시 구료해야 하는 책무까지도 내팽개친 매우 완악한 자들”이라고 꾸짖었다. 지금도 종종 발견하는 관료들의 무사안일주의와 무책임한 태도를 실록에서 읽는 것은 참 우울한 일이다.

윗사람에게 기회만 생기면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관리들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군자감 붕괴사건 한 달 전 태평관 재건축 때의 일이다. 담당 관리가 태평관 개축공사에 승려들을 동원하자고 제안했고,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국가의 인증 없이 살아가는 승려들에게 “부역을 시키고, 도첩(圖帖: 인가증)을 발급해 준다면 태평관 공사도 이뤄지고, 백성들도 괴롭히지 않게 되어, 두 가지 일이 다 잘 되지 않겠느냐.”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천 여 명의 스님들을 험난한 산으로 데리고 가 마구잡이로 천 여 그루를 베었으나, 정작 산 아래로 가져온 것은 100~200 그루에 불과했다. 세종은 “한 치의 공효(功效)도 없는 공사로 많은 승려들이 죽고 다쳤다. 처음 저지하던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정치를 어렵게 여기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세종의 후회는 ‘정치를 어렵게 여기는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그 동안 그는 지방에 내려가는 수령들을 불러놓고 “일을 쉽게 여기고 하면 성공하지 못한다.”면서, “맡은 일을 어렵게 여기고, 온 마음을 기울여 다스리라.”고 당부하곤 했다.

‘정치를 어렵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의 추진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가능한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왕과 신료들은 어렵고 힘들지만, 일하는 사람에게는 공효가 크고, 백성들에게는 편리한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한다. 태평관 재건축의 경우, 국가정책으로 사찰이 통폐합되면서 졸지에 ‘무허가 종교인’이 되어버린 승려들에게 그 결정은 참으로 고약한 것이었다. 종교인에 걸맞는 기준을 마련하는 대신,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인가증을 주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정편의주의요, 야만적인 발상이었다.

능침 앞으로 다가가서 한참 동안 묵념을 했다. 무너진 공사장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을 외면하고 도망친 관리들에 대한 분노, 망쳐버린 건축공사에 대한 후회, 틈만 나면 위로 아첨하고 아래로는 가혹한 관료의 관행을 방심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서른 세 살의 세종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도 시행착오 많았던 인간이었구나!’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사회적 약자를 어루만져 백성들의 신뢰를 얻다.

능침 앞의 바위에 걸터앉아 <세종실록> 7권의 기사들을 일별해보았다. 1429년(재위11년)부터 1432년(재위14년)까지는 대내외적으로 큰 어려움 없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세종은 “평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어지러움을 대비하는 것은 나라 다스리는 자의 도리”라며 최윤덕으로 하여금 전국의 성곽을 점검하게 하고, 군사 훈련의 고삐를 놓지 말도록 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이 시기에 세종이 가장 잘 ‘대비’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일이었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으나, 그는 일관되게 사회적 약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시대 서민의료기관인 활인원(活人院)의 복지개선 조치가 하나의 예다. 늘 묵은 쌀만 먹어 달게 먹지 못해 여위어 가는 활인원 환자들에게 절반만이라도 햇곡식으로 제공해 달라는 요청에 세종은 절반이 아니라 모든 식료를 햇곡식으로 주고, 활인원에서 요청하는 땔나무와 숯에 대해서는 바로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여자 노비들의 출산휴가를 대폭 늘린 조치도 이 시기에 있었다. 세종은 관에 소속된 여자 노비들이 출산하다가 사망하는 일이 많다는 보고를 받고, 기존 7일에서 100일로 휴가를 늘려주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는 출산 전 1개월과 출산 후 100일, 도합 130일의 휴가를 법제화했으며, 4년 후에는 남편에게도 한 달 간의 산간(産看) 휴가를 주게 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세종의 이러한 복지제도 개선에 대해 어떤 사람은 ‘노동인력 확보 차원’이라거나 ‘인기영합주의’ 정책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 식의 특화된 공짜 복지 정책 때문에 세종시대 국가재정이 파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비판은 두 가지 점에서 어긋난다. 그 하나는 사실 관계의 오류다. 세종 초반의 어려운 국가재정은 연속된 가뭄과 흉년의 결과이지 왕의 퍼주기 정책 탓이 아니었다. 또한 해석 측면에서도 잘못이 있다. 세종은 “백성은 얼핏 보기에 어리석지만, 지극히 신명한 존재[至愚神明]”라고 생각했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게 백성이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낮은 자세로 귀 기울이면 마침내 ‘하나로 모아지는 결론’을 들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수시로 들판에 나가 농부들에게 묻고, 군인들의 아픔을 헤아리며, 차별 받는 승려들을 배려한 것은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한국형 리더의 두 조건: 햇빛의 분별력과 햇볕의 따뜻함

왕과 관리는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원만하게 이루어주도록 ‘추대된’ 사람들이며, 그들의 원통함을 듣고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존재 이유라는 게 세종의 신념이었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의 목소리를 왜곡하는 관리들의 아첨성 발언을 가려내는 한편,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았던 세종이 있었기에 15세기 조선시대는 “생생지락(生生之樂)의 시대”, 즉 백성들이 신바람나게 일했던 태평시대로 기록될 수 있었다.

영릉 재실의 마루에 걸터앉아 한낮의 밝고 따뜻한 해를 오롯이 만끽하는데, 문득 좋은 지도자는 “사람과 일을 밝게 헤아리는 분별력(햇빛의 역할)과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보살피는 따뜻함(햇볕의 역할)”을 함께 갖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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