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칼럼

이운진(시인)

마음 속 보석

이운진(시인)

작년 여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딸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어. 수능공부에 지치고 잦은 시험에 자신감을 잃고 의욕마저 사라진 모습이 안쓰러워서 데리고 간 거였어. 무엇보다 마음속에 가득한 그늘과 깊어가는 우울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볼 빌미를 마련하고 싶었지. 돌이켜보니 학창시절의 나도 언제나 슬픔 쪽에 더 가까운 아이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슬퍼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늘 슬픔을 감추고 모른 척 하느라 더 힘들었거든.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 못할 큰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사춘기의 마음속에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곤 했어. 가면을 쓴 듯 웃는 내 모습이 싫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나. 울고 싶은데 마음껏 울 곳도 없다는 걸 그때 알았어. 그런 내 기억을 더듬으며 딸아이를 바라보니 딸의 웃음 뒤에 숨겨진 슬픔이 희미하게 보였던 거야. 7월의 뜨거운 햇살에도 뽀송뽀송 마르지 않는 마음 속 슬픔을 안고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봤어.


11살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의 다섯 감정들이 등장하는 영화였어. 나를 만드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들을 아주 기발한 상상력으로 보여주었어. 기쁨이의 노력으로 긍정적이고 행복한 소녀였던 라일리에게 어느 날 변화가 찾아 왔어. 정든 친구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하고 전학을 가야 하는 일과 맞물려 사춘기로 인해 자주 슬프고 우울한 기분이 되는 거야. 이런 라일이의 변화가 슬픔이 때문이라고 생각한 기쁨이는 슬픔이에게 마음설명서를 다시 읽어보라거나, 동그란 원을 그려주며 원 밖으로 나오지 말라며 경계를 하지. 그러나 결국 소중한 기억을 만지려는 슬픔이를 제지하다 기쁨이까지 감정 컨트롤 타워를 벗어나게 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라일리의 감정은 더욱 극단적이 되어 버리는 거야. 기쁨이는 더욱 슬픔이를 나무라고 슬픔이는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 같아서 주눅이 들고. 라일리도 머리속 감정들도 모두 제 자리를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 가는 상황을 보며 딸아이보다 실은 내 마음속 생각을 더 했던 것 같아. 내 속의 감정들도 제멋대로 엉켜 있거나,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숨겨놓은 감정들이 가득하겠구나 싶었지.

 

기쁨이와 슬픔이가 다시 감정 컨트롤 타워로 오기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어. 그 과정에서 온갖 일을 겪으며 기쁨이가 깨달은 건, 우리에겐 슬픔이 꼭 필요하다는 거였어. 라일리의 어릴 적 상상 속 친구 빙봉의 로켓이 쓰레기장에 버려졌을 때, 기쁨이 아무리 재밌는 얘기를 하고 웃긴 표정으로 빙봉의 기분을 바꾸려해도 빙봉은 슬픔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하지만 슬픔이 다가와 “로켓을 뺏겨서 안됐다… 슬프겠다”라고 말하자 빙봉은 슬픔이를 안고 사탕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스스로 괜찮아졌다고 말하며 다시 일어서는 거야. 그 장면을 본 기쁨이는 놀라서 슬픔이에게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 봐. 기쁨이 하지 못한 일을 슬픔은 어떻게 금방 할 수 있었던 건지 아마 궁금했을 거야. 슬픔과 눈물은 항상 나쁜 상황을 만든다고 믿었던 기쁨이에게 이 모습은 당황스럽기도 했을 테고. 또, 라일리가 엄마 지갑에서 카드를 훔쳐 옛집으로 돌아가려고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 다시 되돌아 온 날 밤. 엄마 아빠의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도 라일리가 흘린 슬픈 눈물 때문이었어. 자신의 슬픔을 숨기지 않고 눈물로 마음을 풀어 낼 때, 비로소 엄마 아빠의 진실한 마음도 들을 수 있었던 거지. 이 순간에 느꼈을 라일리의 마음을 슬픔이는 이렇게 표현했어. “라일리는 슬펐기 때문에 행복했던 거”라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슬픔을 함께 하러 곁에 다가가기 마련이잖아. 그래서 엄마 아빠 품에 꼭 안겨 다 울고 난 뒤에 번지는 라일리의 희미한 미소는 정말 행복하게 보였던 걸 거야.

 

슬픔의 역할은 그런 건가 봐. 슬픔은 위로와 공감, 소통의 길을 열어주는 것 같거든. 슬픔이가 빙봉의 슬픔을 공감하고 엄마 아빠가 라일리의 슬픔을 위로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난 내가 울 때도 울지마, 괜찮아,라는 말보다 그냥 가만히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등을 도닥여 주는 편이 더 따듯하게 느껴져. 그렇게 실컷 울고 나면 슬픔이의 말대로 걱정이 좀 줄어드니까. 영화가 끝나고 딸이랑 슬픔이 얘기를 오랫동안 나눴어. 마침내 기쁨이 “슬픔아, 네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슬픔을 잘 껴안으면 자신과 타인을 더 잘 이해하는 따듯한 사람이 되고, 그렇게 감정도 성숙해 간다고. 그러므로 슬픔은 마음속의 보석과 같다고 말이야. 근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시인은 벌써 오래전에 멋지게 시로 써놓았기에 여기에다 옮겨 보았어.

 

原石 
_정진규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 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富者 외로움 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시의 제목마저 ‘原石’이구나. 아직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의 보석 말이야. 제아무리 값비싼 보석, 보석 중의 보석 다이아몬드도 원석 그대로의 상태는 아름답지 않아. 광산에서 막 채굴해서 투명하고 맑은 빛을 반짝이지 못하는 다이아몬드 원석은 커다란 쿠키에 듬성듬성 박힌 초콜릿처럼 돌덩이에 박힌 불투명 유리파편 같기만 해. 만약 나에게 이 원석을 준다면 나는 다이아몬드인 줄 모르니 버릴지도 몰라. 보석을 보는 눈이 없으니까 당연한 얘기야. 아마도 나중에 누군가 그 사실을 얘기해 준다면 가슴을 치며 후회하겠지. 그러나 그땐 이미 늦은 일이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마음속에 가득한 “슬픔과 외로움과 어두움 같은 것들”이 사실은 다 원석이라는 게 시인의 말이야. 버려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쌓아 놓으면 재산이 되는 것들이라고. 시인이니 더더욱 그렇겠지. 슬픔과 외로움을 모르는 시인이 다른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진실한 글을 쓸 순 없는 거잖아. 슬픔 부자인 시인의 시여서 내가 처음 이 시를 읽고서 그렇게 큰 위안을 받았던 것 같아.


오래전 그때 나는 유달리 감상적이었고 쉽게 좌절했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슬픔을 진 듯해서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곤 했어. 그러다가 우연히 책꽂이에서 빼 읽은 시집 속의 이 시가 내 손을 잡아주는 거야. 영화 속의 슬픔이 빙봉에게 한 일을 시가 내게 해주었던 거지. ‘너도 슬프구나’라고 시인의 마음이 내게 말을 하는 것 같았으니까. 실은 내가 시인도 많이 슬프구나라고 느낀 거였겠지만 슬픔이 원석이라는 말은 그 이후로도 늘 내게 힘이 되었어. 내 마음이 광산이라는 걸 알게 되었잖아. “해 묵어 세월이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고 보석이 되는 原石들이” 가득한 광산을 누구나 품고 있다는 거니까 말이야. 그러니 시인의 말처럼 살림이 이보다 더 넉넉할 수가 없구나.


우리는 흔히 슬픔은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려고 해. 행복한 삶을 꿈꿀 때면 더욱 슬픔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영화와 시는 다른 말을 했어. 슬픔을 표현하고 내 안의 진짜 슬픔을 느끼도록 허락한다면 더 풍부한 삶의 결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리고 슬픔 뿐 아니라 외로움과 어둠 분노까지도 실은 다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 이 감정들을 관계 속에서 제대로 나누는 게 성장하는 일임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 나도 내 친숙한 슬픔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줘야겠어.  

 

*시 출처 :  「원석」 / 정진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이운진> 저자 이운진은 나라는 존재의 작은 맥박을 들려주고 싶었으나, 세상에 늘 지곤 했다. 눈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슬픔이 쌓이면서 시를 쓰는 날이 시작되었다. 힘찬 삶을 꿈꿨던 만큼 지쳐 가던 시절, 화실을 동경하던 어릴 적 마음으로 그림 보는 사람이 되어 시와 그림 사이 어디쯤을 여행하듯 지냈다. 때로는 시가 밤하늘을 그려 주고 때로는 그림이 침묵을 읽어 주었다. 그곳에서는 슬픔도 멋진 동반자였다. 나에게 슬픔을 쓰는 건 슬픔을 포옹하는 일임을 알게 해 준 시와 그림 속 목소리들, 그것을 글로 옮겼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여행처럼 오늘도 마음이 부르는 풍경 속으로 간다. 그동안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과 에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를 펴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 라인 라인 구글+ 구글+

모든 사람에게는 따뜻한 심장이 있다 : 나는 누구의 사만다가 될 수 있을까?
최하진(무비 큐레이터)
▲ 영화 자전거 탄 소년 포스터  ©   드라마/벨기에 이탈리아/2011/12세 관람가 감독: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출연: 토마 도레, 세실 드 프랑스...

꿀빨이새와 아프리카 원주민의 달콥쌈싸름한 공생
조홍섭(환경전문기자)
포르투갈 선교사 조아우 도스 산토스는 1588년 현재의 모잠비크인 아프리카 소팔라에서 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작은 새 한 마리가 교회 벽 틈으로 들어와서는 촛대에 붙어있는 촛농을 떼어먹었다. 그래서 주민에...

어떻게 살 것인가 : 논어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이건주(사법연수원 부원장)
I.  “당신은 어떤 삶을 살려 하나요?” “당신 인생에서 어떤 것들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나요?”  너무 뜬금없는 질문인가요? 하지만 입시나 취업의 면접관, 혹은 친한 친구나 동료, 때로는 자신...

청소년 리더의 조건
조원고등학교
저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나눔리더 이승훈이라고 합니다. 나눔의 리더라는 호칭 정말로 마음에 쏙 듭니다. 수년 동안  봉사를 해오면서 언젠가는 나의 봉사활동에 대한 열정과 여러 봉사활동들에 대해 ...

마음 속 보석
이운진(시인)
작년 여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딸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어. 수능공부에 지치고 잦은 시험에 자신감을 잃고 의욕마저 사라진 모습이 안쓰러워서 데리고 간 거였어. 무엇보다 마음속에 가득한 그늘과 깊어가는 우울에...

평생학습이라는 보석!?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방송통신대 학생들을 만나보면, 너나할 것 없이 입학당시 주변의 반응은 ‘의아함’이었다고 한다. 공부가 그렇게 좋냐, 그 나이에 뭐하겠다고 대학에 들어가냐, 참 피곤하게 산다, 고 한다. 시간이 조금 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국․영․수보다 중요한 이유
김청연(한겨레 교육섹션 '함께하는교육' / NIE매체 '아하!한겨레' 담당기자)
    ‘방탄소년단’, ‘국민청원’, ‘공휴일’   얼마 전, 청소년들과 ‘5분 뉴스 찾기’ 활동을 했을 때 아이들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다. ‘각자 휴대폰으로 5분 동안 뉴스를 검색해본다. 어떤 ...

교사가 인성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조아미(명지대학교 청소년 지도학과 교수)
    학교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지속적이다. 잊을만하면 시선을 끄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난 1년 간만 보더라도 부산과 강릉에서 일어난 청소년 폭행과 같은 사건들은 많은 사람들을...

호랑이 선생님은 왜 학교를 떠났을까 - 지혜로운 교사의 인성 교육
신규진(경성고등학교 교사/'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학교 상담' 저자)
 새해 교육과정 편성을 앞두고 교육청에서 날아온 인성교육 공문의 글귀가 눈에 띈다.  “넘버 원(Number One)에서 온리 원(Only One)으로.”  우리의 교육이 어떤 길을 걸어 왔기에 이처럼 고상한...

좋은 영화를 보면 마음이 커진다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장/'인성, 영화로 배우다' 저자)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은 독일의 유명 여성감독입니다. 세계 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굵게 남긴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이지만, 독일에서는 매우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리펜슈탈은 빼어난 재능 때문에...

4차 산업 혁명과 미래 역량 : 우리는 어떻게 ‘되어가야’ 하는가?
김지영(숭실대학교 베어드학부대학 조교수) / 「다섯 가지 미래교육 코드」 저자
I. 되어가기 Becoming의 시대   "현재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의 80~90%는 이 아이들이 40대가 됐을 때 전혀 쓸모없을 확률이 크다. 어쩌면 수업 시간이 아니라 휴식 시간에 배우는 것들이 아이들...

창의인재 교육의 핵심은 ‘쿨’한 공식이다!
이동조(창의교육그룹 아이디어코리아 대표)
인류가 아직 찾지 못한 창의성의 비밀    학교교육을 통해 ‘창의인재’를 키울 수 없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쉬운 길을 외면한다. 힘들고 어렵고 된다는 보장도 없는 먼 길로 에둘러 돌아간다...

‘정직’은 나를 위한 축복의 메시지-윤리적이라는 것에 대해 근원적으로 묻기
박동섭(이동연구소 소장/독립연구자)
츠쿠바(筑波)대 유학시절 나의 지도교수이자 학문적 스승인 모로 유지(茂呂雄二) 선생의 대학원 수업은 아주 독특했다. 비고츠키를 가장 제대로 잘 이해하고 있다 하여 '일본의 비고츠키'라 불리는 선생은 수업이나...

학교 가기 싫은 초등학교 1학년 딸에게 배운 것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부교수)
지난 5월 내내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둘째 딸과 실랑이로 아침을 시작했다. 입학한 지 두 달이 지나면서 둘째는 그만 학교가 싫어졌다. 3월초 새 신발 신고, 새 가방 메고 매일 환하게 웃으며 즐겁게 학교를 갈 ...

‘좋은 학습, 좋은 성장, 좋은 인생’
이희수(중앙대학교 글로벌인적자원개발대학원장)
누구나 어렸을 때 한번쯤 읽었을 과학소설의 아버지인 Herbert George Wells는 그의 명작 ‘타임머신’에 빗대어 인생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타임머신을 갖고 있다.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는 Me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