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칼럼

박복선(성미산학교 교장)

K시를 걸으며 자립을 생각하다

박복선(성미산학교 교장)
걷는 걸 좋아한다. 특히 낯선 장소에서는 무작정 걸으면서 처음 만나는 풍경을 보는 게 큰 즐거움이다. 낯선 곳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으레 두세 시간은 여유를 두고 도착하도록 시간표를 짠다. 걷다가 예쁜 카페가 있으면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시장이 나오면 반가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서점이 보이면 잠깐이라도 들러 시집 한 권이라도 산다.
K시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것이 오후 세 시였다. 약속 시간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도를 보니 약속 장소까지 걸어서 30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돌아가도 되고, 헤매도 상관없겠다 싶어 방향만 기억하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터미널 주위로 큰 건물이 몇 개 들어서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개발의 바람이 아직 불지 않은 듯했다. 멀리 고층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걸 보면 이쪽은 ‘구도시’인 모양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도, 차도 많지 않아 한적했다. 허름한 건물에 촌스러운(?) 인테리어를 들이고, 막 한글을 뗀 아이가 쓴 것 같은 간판을 단 가게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공터가 있고, 부서진 담장에는 옮기기 민망한 낙서가 있었다. 어느 골목이든 들어가면 낡은 단층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것 같은 집들도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일제 강점기를 시대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여기서 많이 찍었다고 한다.)

정말 삼사십년 전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흥미롭게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걷다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양복점이 있었다! ‘아, 아직 양복점이 남아 있네’ 하며 둘러보는데, 바로 옆에는 양화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한참 서서 구경을 했다. 허름한 건물, 촌스러운 인테리어, 세련되지 못한 간판. 여느 가게와 다를 바 없었다. 손님이 없는 것까지도. 양화점에는 주인마저도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양화점에서 구두를 맞춰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양복은 몇 벌 맞춰 입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주 성가신 일이었다. 양복점에 세 번이나 가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특히 가봉하러 갈 때마다 ‘만들어 주면 그냥 입을 텐데, 왜 자꾸 오라고 하나’ 짜증이 났다. 그러니 공장에서 만들어 낸 옷을 사 입게 되면서 양복점 근처에도 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양복점들은 문을 닫았을 것이다. 양복 만드는 기술로 밥벌이를 하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양복점을 발견하고 나서야 그 많던 양복점들이 다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얼마쯤은 이 일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명멸했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생태주의자로서 나는 골목과 전통 시장을 야금야금 침입해 들어오는 대기업을 비판한다. 지역에서 돈이 돌아야 건강한 경제가 만들어 진다고 믿고 있다. 좋은 마을을 만들려면 마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러니 내 신념에 충실하다면 나는 기꺼이 양복점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물론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품질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가격의 문제도 있겠지. 양복을 입는다는 행위에 대한 해석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을에 양복점이 있다면, 재단사가 믿을 만하다면, 양복을 꼭 사야만 한다면, 양복점에 갈 것 같다고. 굳이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든 어디서든 기술을 익혀서 이웃들이 특별한 날에 입을 옷을 만들어 주면서 먹고 살 수 있는 마을이, 사회가 좋은 공동체라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약간의 불편함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단골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고.

언제부턴가 풍경이 변했다. 신도시에 들어선 것이다. 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은행, 병원, 휴대폰 영업점 등 낯익은 것들이 보인다.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이어져 있다. 단지마다 차량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학교들도 보인다. 학교 근처라 그런지 학원도 있고. 아,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파는 카페도 있다. 한적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자리가 없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자리가 하나 났다. 다들 아이들 이야기, 학교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아이들 픽업하려는 엄마들이다.
아파트 짓고, 상가 짓고, 학교 짓는 여느 도시 개발의 풍경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유난히 텃밭이 많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새로 개발하는 곳에는 어디나 공터가 많다. ‘아직’ 건물을 세우지 않은 곳이다. 땅 주인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터지만, 누군가 빈틈없이 텃밭을 일구었다. 녹색 식물이 바람에 출렁이는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것들이 시한부 텃밭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자체에서 이런 공터를 매입하여 주민들에게 분양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가 될 것인가? 『작은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란 소설이 있다. 클리블랜드에 사는 한 소녀가 쓰레기로 덮혀 있는 공터에 완두콩 하나를 심는다. 우연히 그것을 보게 된 한 할머니가 조그만 밭을 만들어 주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너도 나도 공터에 자기 밭을 만들게 된다. 평소에 통성명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텃밭을 가꾸면서 대화를 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텃밭을 매개로 말을 트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다. 텃밭은 자립의 기반이 된다는 것. 물론 도시에서 하는 농사라 한계가 분명하지만 적은 양이라도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은 자립의 기초가 된다. 전에 성미산학교에서 일을 하던 여교사 한분이 원주로 내려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옥상에는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정원에는 작은 텃밭을 만들어서 채소와 꽃을 가꾸는데, 한겨울 두 달 정도 빼면 반찬 걱정을 하지 않고 꽃구경을 실컷 한단다.

텃밭을 가꾸는 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양계나 양봉도 할 수 있다. 필요한 가구도 만들고, 친구들과 함께 집도 지을 수 있다. 이런 일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 마을 카페에서 시낭송회나 작은 음악회라도 연다면 삶이 얼마나 풍부해 질 것인가? 실제로 이런 삶을 꾸려간다면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마을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구도시에서 본 양복점과 양화점 그리고 신도시에서 본 텃밭을 연결하면 뭔가 좋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굳이 대학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거나, 대학에 가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이라면 열심히 텃밭도 가꾸고, 양계도 하고,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으면서 살면 된다. 물론 살림을 아무리 알뜰하게 해도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어떤 기술을 가져야 한다.
양복점, 양화점의 장인들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장인과 동업을 하거나 가게를 물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양복을 만들거나 구두를 만드는 일이 아니어도 이처럼 우리 살림에 필요한 일, 그리고 전통적으로 마을에서 해 오던 일, 그러나 지금은 대기업에서 가로챈 일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에너지 사용을 줄일 수 있도록 돕는 에너지 설계사 같은 것. 아무튼 이런 기술을 배워서 마을에서 일하며 살 수는 없을까가 고민이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단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불편하거나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기꺼이 마을의 기술자들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꺼이 이런 기술을 배우겠다는 청소년들도 나올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기술을 익히는 것이 루저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좋은 마을,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또한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그것을 격려해야 한다.
자립 생활을 하고, 기술을 배우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대학에 가려고 쓰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그리고 돈 많이 버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해 쓰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자립기술과 전문기술을 배우는 데 쓴다고 생각해 보라. 훨씬 쉽게, 훨씬 높은 수준의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의미 있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철학과 세계관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 라인 라인 구글+ 구글+

교사의 인격적 모범
강선보(고려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
  대학원 시절의 어느 날이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함께 지도교수님의 연구실을 들렀다. 교수님께서는 상당히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계셨다. 그 이유를 여쭈어 보니, 교문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

문학을 읽으면 착해진다고요?
우신영(인천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우리 청소년들은 진짜 인성이 부족한 걸까?     인성교육에 대한 교실 안팎, 사회 안팎의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습니다. 구호(slogan)가 대개 결핍을 반영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인성교육에 대...

교육복지 차원에서 소년원 학교 접근
이화식(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조교수)
  교보교육재단의 2019년 인성교육 현장연구사업에 나의 제안이 선정되어, 안양에 위치한 소년원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에 적용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곳을 생각하니 “선생님, 저 정말 힘들어요...

학교를 바꾸는, 진짜 질문
황주환(경주시 안강여중 교사/‘학교는 왜 질문을 가르지지 않는가?’ 저자)
기말고사 시험이 다가오자, 더 많은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졸기 시작한다. 더 총명하게 공부해야 할텐데, 매번 반대 장면이 펼쳐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 시험을 대비하는 학원의 수업 강도가 높아져, 자정까지 ...

모든 사람에게는 따뜻한 심장이 있다 : 나는 누구의 사만다가 될 수 있을까?
최하진(무비 큐레이터)
▲ 영화 자전거 탄 소년 포스터  ©   드라마/벨기에 이탈리아/2011/12세 관람가 감독: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출연: 토마 도레, 세실 드 프랑스...

꿀빨이새와 아프리카 원주민의 달콥쌈싸름한 공생
조홍섭(환경전문기자)
포르투갈 선교사 조아우 도스 산토스는 1588년 현재의 모잠비크인 아프리카 소팔라에서 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작은 새 한 마리가 교회 벽 틈으로 들어와서는 촛대에 붙어있는 촛농을 떼어먹었다. 그래서 주민에...

어떻게 살 것인가 : 논어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이건주(사법연수원 부원장)
I.  “당신은 어떤 삶을 살려 하나요?” “당신 인생에서 어떤 것들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나요?”  너무 뜬금없는 질문인가요? 하지만 입시나 취업의 면접관, 혹은 친한 친구나 동료, 때로는 자신...

청소년 리더의 조건
이승훈(조원고등학교)
저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나눔리더 이승훈이라고 합니다. 나눔의 리더라는 호칭 정말로 마음에 쏙 듭니다. 수년 동안  봉사를 해오면서 언젠가는 나의 봉사활동에 대한 열정과 여러 봉사활동들에 대해 ...

마음 속 보석
이운진(시인)
작년 여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딸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어. 수능공부에 지치고 잦은 시험에 자신감을 잃고 의욕마저 사라진 모습이 안쓰러워서 데리고 간 거였어. 무엇보다 마음속에 가득한 그늘과 깊어가는 우울에...

평생학습이라는 보석!?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방송통신대 학생들을 만나보면, 너나할 것 없이 입학당시 주변의 반응은 ‘의아함’이었다고 한다. 공부가 그렇게 좋냐, 그 나이에 뭐하겠다고 대학에 들어가냐, 참 피곤하게 산다, 고 한다. 시간이 조금 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국․영․수보다 중요한 이유
김청연(한겨레 교육섹션 '함께하는교육' / NIE매체 '아하!한겨레' 담당기자)
    ‘방탄소년단’, ‘국민청원’, ‘공휴일’   얼마 전, 청소년들과 ‘5분 뉴스 찾기’ 활동을 했을 때 아이들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다. ‘각자 휴대폰으로 5분 동안 뉴스를 검색해본다. 어떤 ...

교사가 인성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조아미(명지대학교 청소년 지도학과 교수)
    학교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지속적이다. 잊을만하면 시선을 끄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난 1년 간만 보더라도 부산과 강릉에서 일어난 청소년 폭행과 같은 사건들은 많은 사람들을...

호랑이 선생님은 왜 학교를 떠났을까 - 지혜로운 교사의 인성 교육
신규진(경성고등학교 교사/'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학교 상담' 저자)
 새해 교육과정 편성을 앞두고 교육청에서 날아온 인성교육 공문의 글귀가 눈에 띈다.  “넘버 원(Number One)에서 온리 원(Only One)으로.”  우리의 교육이 어떤 길을 걸어 왔기에 이처럼 고상한...

좋은 영화를 보면 마음이 커진다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장/'인성, 영화로 배우다' 저자)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은 독일의 유명 여성감독입니다. 세계 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굵게 남긴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이지만, 독일에서는 매우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리펜슈탈은 빼어난 재능 때문에...

4차 산업 혁명과 미래 역량 : 우리는 어떻게 ‘되어가야’ 하는가?
김지영(숭실대학교 베어드학부대학 조교수) / 「다섯 가지 미래교육 코드」 저자
I. 되어가기 Becoming의 시대   "현재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의 80~90%는 이 아이들이 40대가 됐을 때 전혀 쓸모없을 확률이 크다. 어쩌면 수업 시간이 아니라 휴식 시간에 배우는 것들이 아이들...